이제 좀 도장을 정리해서 본격적인 훈련을 계속할 것이다. 또한, 태권도 후계자를 양성해서 고향에 보답도 하고 싶다. 강종한 관장님 곁에 있는 것이 아버지같이 무엇보다 든든했다. 강 관장님은 처음에는 낙향을 적극 반대했다. 낙향은 동료들에게 자칫 패배자 같이 보인다며 만류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끄러운 서울보다 고향에서 운동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안정도 기술향상이 배가될 것 같다. 또 하나의 전지훈련이 안 나가. 며칠간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두루 귀향 인사도 드렸다. 아버지의 친구들 일부는 벌써 하늘나라로 가셨다.
저녁이 되어 공중 후리기, 공중회전 내리찍기, 되돌려차기 등 내 주특기도 실험해 보았다. 맨발로 샌드백을 때리자 발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았다. 블랙홀이 와닿는 공기가 탁하다. 미국의 아갓탤, 프랑스 프갓탤 등 헤매느라 거의 두 달 만에 발차기 해보는 것이다. 역시 무좀처럼 곰팡이가 핀 것 같다. 운동이란 하루만 안 해도 몸이 먼저 알아본다. 찌뿌듯한 게 남의 뼈와 살 같다.
새해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해로 바뀌었다. 며칠 전에 왔던 새 관원들 몇 명이 들어섰다. 검은 것은 세상의 모든 빛과 고통을 빨아들인다. 흰 것은 모든 색깔을 뱉어낸다. 그래서 신부복은 새까만 옷에 모가지 깃만 흰색이다. 세상의 검은 악마들을 모아 하얀 천사로 만들어 내보내는 것일까.
그래서 승복이나 수녀들의 복장은 전부 회색이다. 이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마당에 다 끌어모아서 다 태운 것이다. 태우고, 태워도 남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몸에 입고가야 한다. 운명처럼 사바세계 고통스러운 대중들을 위해 기원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과연 악마가 천사로 변종될 수 있을까. 일시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종이 바뀌는 ‘변종’은 어렵지 않을까.
근원적 유전형질 DNA는 씨앗의 본능 문제이다. 코리칸은 이번 아갓탤에서의 배신은 물론 과거 28년간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이 준 인간의 천성은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참 바꾸기가 쉽지 않다. 공자는 최소한 세 번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 번 아니라 단 한 번의 행위에서도 대충 짐작이 된다. 물론 나만의 아집일지도 모른다.
한겨울이어서 저녁 5시만 되어도 캄캄해진다. 태권도 운동이 좋아서 나오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지도해준다. 대개 돈이 없어서 그 흔한 태권도 도장에 못 나가는 청소년들이다. 부모 몰래 나오는 학생도 있고, 학교 밖 소녀도 있었다. 청주는 워낙 보수적인 데다가 농부들인 부모들은 태권도만 하면 깡패가 되는 줄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본다.
그나마 코리칸이 국가대표 출신이기 때문에 다소 설득이 가능했다. 더구나 요즘은 코로나 귀신 아저씨들 때문에 일반 태권도장은 파리채만 휘날리고 있다. 차영정 선수 부모도 처음엔 얼마나 나를 원망하는지, 출퇴근 때 그 집 식당 앞을 지나다니지 못하고 멀리 돌아다니었다. “한국의 올림픽 메달박스는 전통적 태권도, 레슬링, 복싱 아니야” “오로지 깡다구 정신력 하나로만 세계적 강호들과 비벼댔지” “죽기 아니면 뻗기로 말야.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힘으로 하는 이런 격투기 종목에는 아직도 유럽 심판들이 장악하고 있제”
“그러나 이젠 많이 달라졌어! 축구, 탁구, 골프 등 구기 종목으로 확대되고 있잖아?” “이젠 올림픽에서도 10위권 스포츠 강국이제” 구 선수가 멜버른 경기 준결승에서의 탈락을 아쉬워하며 자기의 잘려나간 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복싱, 레슬링, 펜싱 등 편파 판정이 심했다. 동구권 녀석들의 횡포는 거의 노골적이었다.
남북한 표 대결에서 아슬아슬했다. 바덴바덴에서 정주영 대한체육회장의 88 서울올림픽 유치 또한 오줌이 찔끔거리던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런 선구적인 체육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체육이 이렇게 세계적 수준이 된 대들보이다. 어느 분야보다 세계적 수준에 가장 빠르게 올라탄 것이 체육 분야가 아닌가. 이제는 한류의 문화 그리고 경제, 국방 등 탁월하게 뛰어올랐다. 다만 정치 분야만 오로지 후진국에다가 여의도 국회는 유치원 수준이다.
도장 안에서 샌드백 발차기, 빠른 줄넘기 소리로 조금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오랜만에 구상기, 경은짱 등 선수들을 만나 한껏 취하고 싶은데 취기가 오르지 않는다. “선생님, 이거 잡아왔어유. 도장 안에서 빙글빙글 돌던디유” “이놈들도 태권도하고 싶은가 봐유” 중학생 관원이 싱긋이 웃으며 잉꼬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아침에 은짱이가 일부러 날려 준 잉꼬 암놈이었다.
모두 도망가라고 새장 문을 이미 열어 놓았었다. 숫놈은 이내 푸드덕하고 달아났다. 그런데 암놈은 새집 안으로 자꾸 달려들었다. 그래서, 억지로 꺼내어 다시 날려 보낸 것이다.
코리칸은 문득 강종한 사범의 말이 생각났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다가 우리 안에 가두는 것은 잔인하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을 내쫓는 것은 더욱 잔인하다. 왜 그러냐 하면, 각자의 생활방식과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야망과 의지가 큰 놈일수록 밖에서 키워야 한다. 방 안에 가두어 놓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니? 그때 멜버른 올림픽으로 떠나던 날 김포공항에서 강종한 스승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 뜻을 몰랐다.
이제는 조금 그 뜻이 이해되었다. 크게 될 사람은 크게 생각하고, 큰 안목이 있어야 한다. 사소한 이해관계로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뱅뱅 돌아선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자기가 키운 선수라고 해서 내 울타리 안에서만 놀게 할 수는 없다. 더 큰 세계에 가서 더 크게 놀도록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내 울타리에 가두어 두어 봤자 청주시 대표 아니면 충북도 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울로 보내면 국가대표로 세계적 인물이 될 수 있잖은가. 강종한 스승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역시 자기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강 관장은 자기가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고 키워준 운동선수들이 돈 하나 때문에 다른 도장으로 가버렸다는 배신감은 피를 토하는 분노이다.
코리칸은 어려서 택견도 일찌감치 터득했다. 태권도는 택견에서 현대화, 경기화 된 것이다. 한국택견협회에서는 무형유산으로서 고유의 전통무예를 착실히 유지 계승시키고 있다. 전국 약 85개 무예관에서 택견 전수자 등을 배출하고 있다. 정경화 명인 등 수습 전수제를 통해 현재까지 약 50여 명의 전수자가 택견 자격증을 받았다. 본부가 있는 충주시의 시립 택견단은 세계무술축제도 개최하는 등 활발하다.
계절별로 음력 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 등 특별한 민속행사에서 공동체 결속을 증진하고 고양함으로써 사회통합을 강화했다. 모든 나이의 남성과 여성이 부드러운 곡선동작의 택견을 쉽게 수련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인들의 복잡한 심신을 다스려주고 건강한 생활을 도와주기도 한다.
“고려사(128, 열전41)에는 태권도가 ‘박희(搏戲)에서 나왔어요” 은짱이도 ‘문학과 인생’ 교양과목 시간에 배웠다며 끼어들었다. “의종이 이의민 장군의 수박희를 보고 특별히 대정에서 별정으로 승진시켜주었다.” “충혜왕이 말바위에서 수박희를 보았다” (고려사 36권)는 기록도 있어서 오래전부터 전승되어온 무예이다. 우리는 맨 주목으로 호랑이와도 싸우는 무술이지만 일본은 칼쓰기(훈도시)가 그들의 전통이다. 중국은 태극권에서 보듯이 손, 칼, 봉 등 다양한 무기로 발전해왔다.
다시 카레나의 전화와 문자가 종일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카레나를 싸악 잊기로 했다. 그미가 나에게 빠져들수록 책임감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재주로 그미의 평생을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하고 연득없이 무력감만 무겁게 쌓인다. 그래서 서둘러 화천에서 청주로 도망 나오다시피 내려온 것이다.
코리칸은 초등학교 신입생 때의 하나꼬 담임이 생각났다. 하나코와 카레나 두 여성의 눈망울이나 머리 골격 그리고 행동거지까지 비슷한 게 많다. 재일교포인 하나꼬 선생은 교생실습으로 모국을 선택했단다. 지금쯤 일본에 귀국해서 무얼 하고 있을까. 분명 시집을 갔을 테고, 남편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내가 7살 그때 하나꼬가 내 색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꼬 선생은 태권도 도복을 입은 나를 보고 ‘우수의 작은 탱크’라고도 했다. 내가 늘 생각에 잠겨 있기 때문에 그미가 붙여준 별명이다. 나는 틈만 나면 어머니 생각에 함몰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는 그 흔한 가족사진 한 장도 없고, 어머니 사진도 물론 반쪽도 없었다. 무슨 주민증인가 희미하게 닳아진 어머니의 흔적이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머니 얼굴을 확연히 모르니까 더욱 그립다. 어머니 눈동자 하나만큼은 카레나를 닮은 것도 같다.
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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