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름角力통사’를 편찬한 계기. ⇒ 2005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임용되고, 2006년 박사를 시작하면서 씨름 연구에 관심이 커졌다. 자료를 수집하고, 씨름연구소 홈페이지를 만들어가며 애를 썼지만 찾아낸 사료들은 적었다. 소장 자료도 한정적이었다. 씨름의 역사만큼 다양한 사료가 존재하리라는 판단은 섰다.
자료를 수집, 정리하면 기념비적인 ‘씨름 역사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 1차로 정리한 자료를 토대로 “너희가 씨름을 아느냐?”라는 씨름 지도서를 펴냈다. 지금 읽어보면, 많이 부족하다.
2012년에는 대한씨름협회 연수원에서 편찬하는 “씨름 총론”에 참여했다. 20여 명의 연구자가 분야별로 접근해 편찬을 시도했다. 여전히 비슷한 내용을 재탕, 삼탕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남들이 접근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고민했다.
▲ 2016년 씨름계를 떠났다. ⇒ 씨름협회는 자리싸움이 치열하다. 회의감이 들던 중 중앙대 산학협력단에서 진행한 “씨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가치 조사 연구용역” 참여를 제안받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에 협회 이사를 사퇴했다. 이런 자극을 준 분 중 한 분이 영남대학교 박승한 교수님이다.
교수님은 선수 출신이시면서 대한씨름협회 회장도 역임한 분이다. 후배들을 위해 저서를 편찬하는 등 씨름 발전에 공헌을 하셨다. 2022년 박 전 회장님께 연락을 받고 ‘대한씨름협회 100년사 연구용역’에 참여했다.
▲ 씨름 사료는 많지만 정리되지 않았다. ⇒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무예이자 놀이는 ‘씨름’이다.
씨름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왕, 양반, 장수, 백성들이 즐기던 삶 속 유희이자 놀이다. 마을 간 경쟁에서는 승부를 다퉈야 하는 공동체 문화로 자리 잡았다. 고구려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 등이 씨름의 역사를 증명한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난중일기》, 《연려실기술》, 《노상추일기》 등 100여 편의 시문집, 기행록 등에서도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 김홍도, 신윤복, 김준근, 유숙의 화폭에서는 씨름 경기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친필 ‘각력(角力)’을 찾았을 때는 필체에서 감동이 밀려왔다.
이에 반해 1918년 매국노 경성시찰단원인 양하구, 이완용 등이 ‘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기밀문건 보고서’를 외무대신에게 보낼 때 “단오일에 노소 구백 명이 모여 ‘시름(脚戲)’하는데”라는 문건을 확인할 때는 울화가 치밀었다. 1927년 11월 27일에는 일제강점기 속에서 ‘조선씨름협회’를 창립했다. 12월 20일에는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가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렸다. 1927년 조선씨름협회 창립을 앞두고는 전국의 씨름 종류를 조사하는 노력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기록, 정리한 씨름 도서는 없다. 《승정원일기》 이외에도 각종 시문집 등에는 씨름 기록이 많은데 아직 못 찾았거나 공개하지 못한 기록들도 있다.
⇒ 대한씨름협회 홈페이지, 대한씨름협회에서 제작한 씨름 유튜브, 도서 등에서는 역사와 어원 등의 오류를 찾을 수 있다. 고려에서 씨름을 즐긴 임금을 충혜왕(忠惠王)이 아닌 충숙왕(忠肅王)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내수(內竪)’가 아닌 ‘소동’들과 씨름하였다 하고, ‘원(元)나라’에서 즐긴 씨름을 고려 ‘궁궐’에서 즐겼다고 했다. ‘각력희(角力戲)’를 ‘각저희(角抵戲)’로 기록하기도 한다.
1927년 조선씨름협회의 초대 회장은 김동형인데, 대한씨름협회 홈페이지에는 1936년 여운형을 초대회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한씨름협회에서 만든 유튜브에는 ‘씨름’은 타동사 ‘씨룬다’에서 ‘씨룸’, ‘씨름’으로 명사화됐다고 한다. 영남 지방의 방언에 서로 버티고 힘 겨루기를 “서로 씨룬다”라고 하며 오래 버티는 모양을 “대기 씨룬네”라고 했는데 이를 명사화하는 과정을 통해 “씨룬다 → 씨룸 → 씨름”이 됐다는 것이다.
1728년에 편찬한 《청구영언》에는 ‘씨름’이란 용어가 최초로 보이고, 1447년 《석보상절》에는 ‘실흠’, 《묘법연화경언해》에는 “샹빡(相撲)은 실훔이라”는 기록과 《간경도감》에도 같은 기록이 보인다. 《월인석보언해》에는 ‘입힐움’이 보이는데, 1587년 선조(宣祖)의 명으로 《소학》을 《훈민정음》로 풀이한 《소학언해》를 참고하면 ‘힐후다’의 명사형 ‘힐훔’이 ‘씨름’으로 발달했다고 보기도 한다. 1447년 《석보상절》과 1459년 《월인석보》가 간행되기 이전 분명 ‘씨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기에 여러 사료에서 ‘실흠’과 ‘힐훔’ 혹은 ‘실훔’, ‘실홈’, ‘시름’ 등이 기록될 수 있었다. 선행연구자, 집필자의 기록을 인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재인용 하다 보니 오류가 발생한다.
▲ ‘씨름 역사서’가 필요할 때. ⇒ 2017년 씨름은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2018년에는 남북 공동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2020년 이태현 교수(용인대학교 무도스포츠학과)와 ‘씨름역사서(그 당시 책 제목)’를 집필하기로 한 후 2년이 더 걸려 ‘씨름角力 통사’가 완성됐다.
필자에게 ‘씨름角力 통사’는 그동안 집필한 100여 편의 논문보다 더 큰 수고가 담겼다. 자료를 수집하는데 힘이 들어 몇 번이고 포기하려고도 했다. 집필 과정에서 자료를 제공해 준 박승한 한국씨름연구소 소장님과 허건식 박사님, 일본 자료 등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데 수고해준 권석무 기자 등이 있었기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후배들을 위해 씨름역사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아놨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다만 《승정원일기》는 해석이 진행되지 않아 필자가 해석하거나 의뢰하여 해석하는 수고도 있었다. 따라서 일부에는 해석의 오류가 있을 것이다.
▲ ‘씨름角力 통사’ 2‧3편이 나오나. ⇒ ‘씨름角力 통사’는 씨름의 탄생과 1950년 이전까지의 기록을 담았다. 한국전쟁 이후 씨름기록은 많다. ‘씨름角力 통사’ 편찬은 마무리할 것 같다. 저작권 동의서를 받는데 힘이 든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공익기관과 조선일보에서는 무상으로 저작권을 동의해줬다. 감사하다.
지금은 ‘씨름角力 통사’를 집필할 때 부족했던 내용을 수정하고 있다. 다시 읽어보니, 수정할 곳이 많다. 후배들이 ‘씨름角力 통사’를 토대로 더 좋은 ‘씨름 역사서’를 편찬하면 좋겠다.
Profile 53대, 56대, 57대 금강장사 용인대학교 격기지도학과 교수 대한씨름협회 연구위원장 대한씨름협회 이사 문체부 전통무예진흥위원회 위원 <저작권자 ⓒ 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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