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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골목대장, 도시 싸움꾼과 맞짱뜨다!(1편)
대한호국무예합기도협회 유선종 총재
기사입력: 2014/05/02 [15:59]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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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호국무예합기도협회 유선종 총재© 무예신문
정통 합기도인으로, 평생 합기도 외길 인생을 걸어 온 유선종 총재. 그는 국내를 넘어, 합기도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럽에 합기도를 뿌리내리는 데 청춘을 바쳤다. 영원한 합기도인으로 남고 싶다는 유 총재. 그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를 들어봤다. 
                                                                        
지난 1952년 8월, 나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사당리(現 서울 사당동)에서 5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은 관내에서 알아줄 만큼 부유했다. 농부이자,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60년대 중반부터 토목사업을 크게 벌였다. 할아버지께서 ‘앞서 사람을 이끌라’며 돌림자인 종자 앞에, 선(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등 대가족이 함께 살았다.

어릴 때 다부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또래에 비해 키는 작은 편이었지만, 힘이 좋아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성격은 전반적으로 내성적인 편이었다. 어른들이 지게를 지는 걸 보고 무척 따라해 보고 싶어했다고 한다. 며칠을 울며 보챈 끝에 내 지게가 생겼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당시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아저씨 두 분이 내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그 덕분에 어른들 사이에서 별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키가 작은 것도 지게를 지고 다니던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1959년, 나는 봉천동에 위치한 은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근처에 학교가 없어, 집에서 1시간가량 거리를 뛰어 다니곤 했다. 신림동 근방 아이들과 나를 포함해 봉천, 사당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함께 학교를 다녔다. 이중 도시 아이들이 우리를 시골 촌놈이라고 놀려대거나 무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우리 반 정원 80여명 중 도시 아이들과 시골 아이들의 비율은 절반 정도로 비슷했다.
▲ 네덜란드에서 급 심사를 마친 직후 현지 제자들과 함께(가운데 양복차림, 1987) ©무예신문

양 측의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했고, 마침내 시골 아이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양 측에서 대표들끼리 한판 붙자는 제안이 이뤄졌다. 시골 아이들 대표로는 골목대장이었던 내가 뽑혔다. 도시 대표도 싸움깨나 잘하는 친구였다. 도시 대표와 자존심을 건 진검승부가 펼쳐졌다.

방과 후 교실은 순간 아수라장이 됐고, 아이들은 서로의 대표를 응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둘 다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수십분이 지나도 승부는 좀처럼 가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무승부를 선언했다. 이후 시골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반목을 해소하기로 약속했다. 50여년이 흐른 현재, 도시 대표로 나왔던 친구 녀석과는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당시 수업과목 중 산수는 취약한 반면, 국사와 체육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역사를 특히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100미터 달리기 대표로 출전하곤 했다.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  지난 1966년, 나는 노량진 본동에 위치한 동양중학교로 진학했다. 도보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1시간에 1대인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걸어 다니곤 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5촌형을 따라 용산 중앙도장에서 유도를 배웠다. 도장에 중학생은 나 혼자였다. 반년 동안 엎어치기와 낙법 2가지만을 배웠다. 대부분 잔심부름을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유도를 그만뒀다.

이후 국술원이 흑석동에서 문을 열었다. 정식 오픈 전이었다. 사실상 도장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합기도를 처음 익혔다. 체질에 맞았다. 호신술, 발차기, 낙법 등이 모두 있어 활용도도 높고 재미도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매일 하루 2시간 이상씩 도장을 찾았다.

이때 도장에서는 청띠와 홍띠로 나누고 수련생들끼리 겨루기를 시켰다. 문제는 내 또래가 없어 매번 성인들과 붙게 됐다는 것. 비록 나보다 수련 시간이 적다고는 해도 성인과의 대결은 힘에 부쳤다. 매번 깨지기 일쑤였다. 어른과 중학교 2학년의 대결에서, 나는 내 한계에 직면했다. 관장님께 6개월 동안 1:1 대련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날부터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묶고 산에 올라갔다. 사방공사로 심어놓은 작은 소나무를 뛰어넘으며 발차기를 연습했다. 하루 4시간씩 꼬박 운동만을 매진했다. 점프력과 순발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뤄진 재시합.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6개월 동안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른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없었다. 대신 순발력과 점프력이 좋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승리도, 패배도 아닌 무승부 시합이 펼쳐졌다. 이후부터 어른들은 나와의 대결을 거부했다. 워낙 재빨라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즈음,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께서 폐결핵과 함께 6개월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내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는 취업을 위해 용산공고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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